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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경제학자: 2-5. 카를 마르크스

by elysian-0621 2024. 8. 20.

1845년–1848년: 브뤼셀 망명기

〈공산당 선언〉 독일어 초판본 (1848년 2월 21일)

프랑스에도 독일에도 머무를 수 없는 신세가 된 마르크스가 벨기에 브뤼셀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 1845년 2월이었다. 마르크스는 벨기에에서는 현재의 정치 시사에 관한 글은 쓰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브뤼셀에는 유럽 각지에서 망명 온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많았는데, 마르크스는 그들과 어울렸다. 같은 해 4월, 엥겔스가 독일 바르멘에서 브뤼셀로 마르크스를 따라왔고, 의인동맹 간부단도 브뤼셀을 새 본부로 삼으려 했다. 얼마 뒤 엥겔스와 사실혼 관계가 되는 메리 번스가 잉글랜드 맨체스터를 떠나 브뤼셀로 와 엥겔스에게 합류했다.

1845년 7월 중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잉글랜드로 가서 차티스트 운동 지도자들을 방문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첫 영국행이었으며, 1842년 11월부터 1844년 8월까지 이미 2년간 맨체스터에 머물렀던 엥겔스가 여행안내자 노릇을 해주었다. 엥겔스는 그사이 영어를 배워 유창하게 말했을 뿐 아니라, 차티스트 운동가들과도 안면을 트고 가깝게 사귀고 있었다. 그랬기에 엥겔스는 잉글랜드의 차티스트, 사회주의 언론들을 물어다 주는 기자 노릇까지 해주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잉글랜드 여행을 런던과 맨체스터의 다양한 도서관들에서 경제학 자료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했다.

그해 말, 유럽 전역은 1848년 혁명으로 시위, 반란, 폭력적 대 격동에 휩싸였다. 프랑스에서는 2월 혁명으로 입헌군주국이 무너지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세워졌다. 마르크스는 이런 혁명 활동들에 호의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 아버지의 유산 6,000 내지 5,000 프랑을 받았는데, 마르크스가 그중 3분의 1을 벨기에에서 혁명을 시도하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조달하는 데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의심되고 있지만, 어쨌든 벨기에 법무부는 마르크스가 그런 반란 모의를 했다고 기소, 체포하려 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 공화국이 들어섰으니 이제 안전하리라 생각하고 프랑스로 도망갔다.


1848년–1849년: 쾰른 일시귀국

마르크스는 파리에 잠시 머무르면서 공산주의자동맹 본부를 파리로 옮기고 파리에 살던 독일인 사회주의자들을 규합해 독일 노동자동호회를 설립했다. 혁명이 독일에까지 번지기를 기대하며 마르크스는 1848년 쾰른으로 갔고,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라는 찌라시를 돌리고 다녔다. 동년 6월 1일,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유산을 털어 《신라인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이 신문을 통해 유럽 전역의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다. 마르크스는 주필이자 대기자로서 신문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졌다. 공산주의자동맹의 다른 맹원들도 기고를 하기는 했지만, 엥겔스의 회고에 따르면 《신라인신문》은 그야말로 마르크스 독재였다.

마르크스 등 혁명가들은 경찰에 정기적으로 괴롭힘을 당했고, 마르크스는 여러 번 기소되었다. 마르크스가 기소된 혐의는 검사장 모욕죄, 언론지상 경범죄, 조세 거부 및 무장 반란 선동죄 등이었는데,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다.

프랑스 당국은 마르크스를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추방했다. 아내 예니가 곧 넷째 아이를 낳을 판이었는데, 독일도, 벨기에도, 프랑스도 머무를 수 없게 된 마르크스는 마침내 1849년 8월 런던 망명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