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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경제학자: 2-6. 카를 마르크스

by elysian-0621 2024. 8. 20.

1850년–1860년: 런던 망명기


마르크스는 1849년 6월 초 런던에 도착했고, 이후 런던을 거점으로 삼아 여생을 보냈다. 공산주의자동맹 본부 역시 런던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1849년에서 185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공산주의자동맹 지도부에 분열이 일어났다. 아우구스트 빌리히와 카를 샤퍼가 이끄는 파벌은 공산주의자동맹이 지금 봉기하면 전체 노동계급이 전 유럽에서 "동시적으로" 들고일어나 합류할 것이며 전 유럽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각적 봉기를 선동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무계획적 봉기는 '모험주의적'이며 공산주의자동맹의 자살이 될 것이라고 거부했다. 샤퍼나 빌리히 등이 주장한 봉기들은 유럽의 반동 정부들의 군경에 쉽사리 분쇄될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그것이 공산주의자동맹의 파멸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사회변혁은 하룻밤 사이에 한 줌 인간들의 의지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대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의 경제 상황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매진했다. 1848년 유럽을 휩쓴 봉기들이 분쇄 당한 현재의 사회발전단계로 미루어 볼 때,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진보적 부르주아들과 합작하여 봉건 귀족제를 우선 타파하도록 공산주의자동맹이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정부 개혁, 입헌공화국, 자유선거, 보통(남성)선거를 요구하는 부르주아 민주화 운동에 노동계급이 참여해야 하며, 노동계급 의제와 노동계급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그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적 결과를 거둔 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850년대 말이 되면 미국인들은 유럽 사정에 관심이 시들해졌고, 마르크스의 기사들도 '노예제 위기'나 1861년 미국 내전 발발 같은 미국 국내 문제들을 주로 다루게 된다. 1851년 12월에서 1852년 3월 사이에 마르크스는 프랑스 2월 혁명에 대한 이론연구를 집대성하여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 계급투쟁론, 무산자독재,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무산자의 승리 등 여러 개념을 넘나들었다.

1852년 미국 불황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혁명 활동에 대한 낙관론을 주었다. 물론 이 정도 경제는 아직 자본주의 혁명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미숙했다. 미국의 사회불안정은 서부의 빈 땅 개발 바람으로 희석되었다. 더구나 미국에서 일어나는 경제위기가 유럽 대륙의 경제에 혁명적 확산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유럽의 각 국가는 국경선을 경계로 철저한 폐쇄경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최초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857년 공황이었다. 이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공황이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친 최초의 "글로벌 경제위기"로서, 그전까지의 경제이론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1857년 3월 21일, 다나는 마르크스에게 불경기 때문에 매주 기사 한 부치 원고료만 주게 되었다고 통보했다. 다른 특파원들은 기사가 지면에 실려야 원고료를 받았지만 마르크스는 기사가 실리지 않아도 매주 한 부치의 원고료는 받았다. 마르크스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기사를 송고했다. 10월이 되자 《트리뷴》은 재정 악화가 더 심해져 마르크스와 다른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유럽 특파원을 잘랐고, 마르크스도 주 1회 기사로 일감이 줄어들었다. 1860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마르크스의 기사는 달랑 다섯 번 지면에 게재되었다. 6개월 쉬고, 마르크스는 1861년 9월부터 1862년 3월까지 기사를 썼다. 그 뒤 다나가 마르크스에게 미국 국내 문제로 인해 《트리뷴》에는 더 이상 런던 특파원 자리를 둘 여유가 없다고 편지를 썼다. 1857년 4월, 다나는 마르크스에게 《신미국백과》의 전쟁사 부문 집필을 주선했다. 다나의 친구이자 《트리뷴》 문예 주간이었던 조지 리플리의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백과사전에 67개 항목에 기여했다. 그 중 대다수인 51개가 엥겔스가 쓴 것이었지만, 마르크스도 대영박물관을 돌아다니며 다소간의 연구로 도와주었다.